베드로와 요한이(26), 주여 왜 이 비천한 여인을 ....

돈이 많아서, 영향력이 커서, 가문이나 자녀들이 훌륭해서, 많은 기적을 행해서, 인기가 높아서, 아닙니다.

전혀 아닙니다.

그런 것들과는 아예 거리가 먼 여자…….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바느질,

그것도 더 가난한 과부들에게 옷을 만들어 주는 일을 하다가 죽었습니다.

병명도 소개하지 않아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. 또 그여 인한 말은 한마디도 기록이 없으니 아픈 것이나 고단하고 힘든 상황을 알 수 없습니다.

얼마 전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 성전 밖으로 끌려 나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

“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”라고 외치며, “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.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. “하고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자는 듯이 죽어간 스데반을 그 자리에서 바로 살리셨다면,

충격이나 효과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텐데 …….

그는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 그대로 데려가시고 오늘은 이 이름 없는 가난 한 중에 가난한 과부 도르가를 살리십니다.

그러나 욥바에서 선행과 구제를 심히 많이 하던 도르가는 성경에 유일한 여제자라는 타이틀을 얻었습니다.

“침묵은 금이요, 웅변은 은이다.”라는 영국의 평론가 토머스 칼라일이 한 말입니다.

“말은 한 사람의 입으로 나오지만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.”라는 경고도 있습니다.

주제 파악 못 하고, 자기 눈의 대들보는 못 보고, 자기 몸에 X 묻은 것은 모르고 남을 비판해 대는 세상 -.

조용히 실천하다가 간 도르가의 모습이 그리울 때입니다.

Previous
Previous

4월26일, 왜 그 여자의 집으로 갔을까요? (행 12:1-25)

Next
Next

베드로와 요한이(27), 선민을 넘어 만민에게로 -